요새는 내가 하리라고 생각지 못했던 일을 하고 있다. 여태까지는 대학원에 다니고 매체에 글을 쓰면서 미미하지만 그래도 나의 컨텐츠를 생산하는 일을 주로 했는데, 지금은 다른 이들의 컨텐츠를 관리하고 그것이 출판되도록 매개하는 일을 한다. 건축은 내가 잘 아는 분야는 아니지만, 그 분야에서는 누구나 알 정도의 거장들의 글을 두고 일을 하는데 거기에 내 목소리를 낼 틈이 있을 리가 없다. 그건 나도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는 바다.

이전에도 미술관에서 꽤 오래 일했지만, 온전한 하나의 프로젝트를 담당한 사람으로서 일해 본 적은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거기서는 내가 높은 지위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직접 글을 쓰거나 내가 만든 컨텐츠를 활용할 일이 많았다. 아무래도 내가 전공하는 분야이니 더욱 그랬겠지만. 그런데 역설적으로 나는 지금 일하는 곳에서 그 때보다 상대적으로 더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지만 나의 역할은 컨텐츠 생산이 아닌 매개자에 머무른다. 규모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큰 조직에서 일하니 컨텐츠 제작은 완전히 가장 높은 사람 한두 명에게 일임된다. 아주 똑똑한 사람들도 행정적인 일에 치이는 상황에서 결코 석사 수료생 나부랭이가 뭘 만들어서 내놓을 틈은 없다.

매개자로 일하면서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다. 좋은 점이라면 우선 내가 머리에서 뭔갈 쥐어짜낼 필요가 없이 해야 하는 일만 잘 처리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배우는 것도 꽤 많다. 내가 뭔가를 만들어 내야만 하는 입장으로 쭉 살면서 많이 지친 차에 일견 마음이 편하다. 나쁜 점이라면 우선 이런 일이 익숙하지 않아서 오는 스트레스, 그리고 아마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느끼는 거겠지만 내 자신이 텅 비어가는 느낌이 든다는 점이다.

사실은 전에 일하던 미술관에서 내가 처음으로 작품 디스플레이를 담당한 적이 있었는데 그 전시에 크게 구멍을 낼 뻔했다. 사회과학, 인문학 전공 답게 글을 쓰고 뭘 감상하고 구경하고 평가하는 데만 도가 텄지 사실 그걸 완성하는 과정에 대한 이해가 별로 없어서 머릿속에 아이디어나 계획만 많을 뿐 어떻게 시작을 하고 실현하고 마무리해야 할 지 몰랐던 상태였기 때문이다. 어찌저찌 해결은 됐지만 그런 사태를 벌이고 나서야 처음으로 과정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별로라고 평가했던 작품에 비용, 시간, 인력의 한계 등 얼마나 많은 요소들이 끼어드는지 그제서야 제대로 생각해 보았다. 그 때를 기점으로 비평에 대한 관점도 완전히 바뀌었다.

물론 ‘많은 비용이나 시간을 감당하지 못 하는 작가의 사정을 감안해서 작품을 너그럽게 평가해 주자’ 같은 생각을 한 건 아니다. 전에는 온전히 작품이 최종적인 결과물로서 주는 느낌만을 소비자의 입장에서 평가했다면 지금은 어떤 과정을 통해 어떻게 만들었는지가 왜 작가들에게 여전히 작품에서 중요한 소재이자 요소가 될 수밖에 없는지 이해한다. 사실 작품을 만드는 과정을 결과물과 완전히 분리하는 건 상당히 의식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거라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이제 작품을 보면 만들기까지 어떤 과정이 있었을지 상상부터 해 본다.

다양한 과정을 경험하고 이해하는 건 공부만 하는 사람이 놓치고 살기 가장 쉬운 부분인데 이 점은 꽤 아이러니하다. 작품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일들이 사실 크고 작게는 다 보이지 않는 과정을 가지고 있고, 생각보다 그 과정이란게 중요하다는 걸 나는 아주 뒤늦게 알았다. 나는 결과물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을 매우 귀찮게 여기고 경시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나 자체가 결과물이랑은 별 관련이 없는 과정의 일부가 되어보는 것 자체도 의미있는 일이란 생각이 든다.

답글 남기기

아래 항목을 채우거나 오른쪽 아이콘 중 하나를 클릭하여 로그 인 하세요:

WordPress.com 로고

WordPress.com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Twitter 사진

Twitter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Facebook 사진

Facebook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Google+ photo

Google+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s에 연결하는 중